새벽 5시, 문득 떠오른 정치인의 얼굴
새벽 5시,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기억 하나가 있었다.
몇 년 전, 지역의 한 의정보고회 현장 주차장에서 만났던 모 중진 정치인과의 일이다.
언론인으로서 예의를 갖춰 명함을 건넸으나 그는 명함과 필자의 얼굴을 무심하게 흘깃 훑어보더니 아무런 인사의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행사장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치인에게 명함을 받는 일은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서 민심을 대변하고 글을 쓰는 언론인의 명함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단지 개인적인 불쾌감을 넘어 '권력을 쥔 자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언론인은 글을 쓴다. 당장 그 자리에서 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언론인은 그날의 느낌과 정치인의 태도를 마음속 '살생부'에 담아두고 시간차를 두어 붓끝으로 증명해 내는 존재다.
"기자와 언론인은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불가근불가원)"는 정치권의 오랜 격언은 언론이 가진 취재와 기록의 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함에서 출발한 것이다.
오만한 권력과 '내 마음대로 공천'이 남긴 상처
정치인이 언론인을, 나아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태도는 결국 국정 운영과 당내 행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최근 민주당 당권 경쟁과 정치권 전반에서 들려오는 잡음 역시 이러한 '권력의 오만'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텃밭이라 불리는 호남과 광주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공천 파행은 지역 민심을 깊이 병들게 했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과신 아래 지역의 민심과 배려는 온데간데없이 중앙 권력의 잣대로 내리꽂은 전략공천이 대표적이다.
광주특별시장 경선 과정에서 일어난 점수 비공개 논란이나 광주특별시 부시장 전국민추천제를 도입해 놓고 결국 인수위 출신 인사를 지명하는 식의 행태는 '위로부터의 독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아무거나 심어도 잘 자랄 것이라 믿었던 텃밭이었을지 모르지만 민심을 외면한 권력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민심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정치는 결국 재도전의 무대에서 엄중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정치인이 기억해야 할 '명함 한 장'의 소중함
언론인은 중앙 일간지에 있든 지역과 공익의 현장에서 뛰든 모두 사회의 목탁이자 기록자들이다. 지혜로운 정치인은 언론인의 명함 한 장을 받을 때 그 안에 담긴 주민의 목소리와 취재의 깊이를 본다.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먼저 건네며 진정성 있는 소통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지금 당대표 선출 등 거대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과연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집권 여당 혹은 거대 야당의 권력에 도취 되어 한 표를 행사하는 당원과 시민 그리고 현장의 언론인들을 소홀히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언론인에게 찍히면 혼난다는 사소한 표현을 넘어 '민심의 기록자'를 가볍게 여기는 정치인은 결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한 장의 명함에 담긴 무게를 아는 겸손함 그리고 민심을 무겁게 두려워하는 인성을 갖춘 지도자만이 혼란스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국정 운영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쓰는 언론인의 펜 끝은 권력자의 화려한 언변이 아닌 그들의 작고 스쳐 지나가는 '태도'를 기록하고 있다.
[논설위원 : 한국언론미디어그룹 / 한국인터넷뉴스협회 호남 회장 한성영]